조선 시대의 사당에 영정을 모신 유일한 여인
논개는 진주 관아에 속해 있던 기생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전라도 지역으로 진군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진주성 공격을 감행했다.
우리 군사들은 백성들, 의병들과 힘을 합쳐 막았지만, 왜군의 거센 공격에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왜군의 장수들은 승리를 자축하는 잔치를 촉석루에서 벌였다.
논개는 곱게 단장을 하고 촉석루 아래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섰다.
한 왜군 장수가 논개를 보고 팔 벌리며 다가서자, 논개는 그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훗날 그 바위를 의암이라 이름 짓고, 사당에 영정을 모셔 그 의로움을 기리고 있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났으며, 유몽인 저 「어우야담」을 통해 기생이었음이 알려졌다.
유몽인은 논개의 의로운 희생이 신분 때문에 기록으로 남지도, 국가적 보상을 받지도 못한 것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이야기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논개의 의로운 희생을 기리기 위한 의암별제
1868년(고종 5년) 진주목사이던 정현석은 논개의 사당을 다시 중건한 뒤, 논개에 대한 제향을 실시토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이다.
의암별제는 매년 6월중 길일을 택해 기생들만이 치르는 대규모 의식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을 제외하고는, 모든 의식을 여자들이 주관하는 독특한 제전이다.
첫 제례 때 300명의 기생들이 연 3일 동안 진행하였으며, 엄숙한 제례의식과 의암별제 가무가 펼쳐내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진주목사 자신도 감격하여 "무진년 6월, 단을 만들고 향불을 피워 3백 명의 기생들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논낭자의 의로운 영혼이 내려오는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시민들이 동참하여 진주의 충절을 기리는 <진주논개제>
진주의 뜻있는 문화예술인들은 논개를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진주의 7만의 민, 관, 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했다.
시민들이 동참할 수 있는 전통제를 창제하기로 하여 <진주논개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진주논개제>는 매년 5월 넷째 주 금, 토, 일 3일간에 걸쳐서 호국충절의 성지 진주성에서 개최된다.
위에서 살펴본 의암별제를 서막으로 하고, 진주오광대를 비롯한 민속예술과 진주기생들이 남긴 교방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통문화와 여성을 테마로 한 축제이다.
교방문화에서의 '교방(敎坊)’은 고려와 조선시대 당시 기녀들을 주축으로 하여, 춤과 노래를 관장하던 기관을 말한다. 교방문화는 교방을 통해 전승된 전통춤 및 노래에 더해, 음식, 예절, 놀이 및 풍습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전통예술을 위주로 하여 봄에 개최하는 논개제는, 순수예술 중심이며 가을에 열리는 개천예술제 및 진주남강유등축제로 이어져 진주를 축제의 도시로 만들고 있다.
진주논개제
진주논개제는 임진왜란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한 7만 민·관·군의 넋을 위로하고, 의기 논개의 천추의열을 기리는 진주정신에 바탕을 둔 축제입니다
nongaefestiv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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